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3 / 김봉렬 글 / 이인미 사진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6.5.15 | 목록
김봉렬 지음
발행일 2006년 3월 31일 | 면수 368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25,000원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3 / 김봉렬 글 / 이인미 사진 / 돌베개

부제 : 이 땅에 새겨진 정신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1』을 잃고 3편 으로 바로 건너뛰었다.

왜…..

그냥….

책 한 권을 손에서 놓을 때쯤이면 늘 서고에서 나를 기다리는 10여 권의 책들 중에서 다음 책을 고르는데 이번 김봉렬 저자의 책은 인연이 되고 나서도 한참을 내 손에 올라오지 못 했던 책.

우리 건축 이야기를 풀어가는 대상이 되는 30여 개의 건축물을 대부분 돌아봤고, 이 책 말고도 다른 책에서 서원과 관련한 책들을 한 두권은 본 적이 있기도 하고…

좀 늦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무조건적으로 우리 건축이 최고라는 말을 지극히 절제하고(물론 시원하게 말할 때도 있고), 있는 그대로 지금 현존하는 건축물들의 존재를 통해 그 사실들의 추론하여 그 건축의 요인이 되는 설계자 혹은 건축주들의 마음의 근원을 찾아간다.

찾아가는 방법 또한 지극히 추상적이지도 않고, 주관적이지도 않고, 막연하게 세계적이라고 추켜 올리거나 이상적 건축이라 단정하지 않고 역사 속에서 그 건축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왜 존재하였는지, 처음에는 어떻게 시작해서 이렇게 멋지게 좌향하게 되었는지 등을 연구하여 논한 책.

‘진즉에 먼저 만나볼걸….’이라는 생각이 늘 머리를 떠나지 않아서 2권을 넘어 3권을 어떻게 마감했을까 궁금해서 3권을 먼저 뽑아 들게 됐다.

부석사 대지를 9단으로 나누고, 석등의 좌향을 보고 오른쪽으로의 동선을 찾고, 서원의 폭좁은 계단과 박석에서 엄격한 서열을 중시하는 사상을 추론하고, 영남 일대의 사찰에서 백두대간의 북향으로 권력을 확대하고자 하는지권자들의 북진 의지를 읽어낸다.

자칫 우리것을 세계화하는 과정에서 우물 안 개구리가 세상에서 제일 큰 돌멩이라고 작은 조약돌 하나 들고 우물 밖으로 나와서 자랑하면 먹히던 시절(물론 안으로만 ^^;;)이 있었다.

그러다가 세상이 인터넷으로 급격하게 좁아지면서 적도 나를 잘 알고, 나도 적을 잘 알게되는 세상이 왔다.

우물 안에 있던 개구리는 손바닥보다 작은 조약돌 하나 들고 나와 자랑하다가 그를 본 옆집 어린애가 던진 그 조약돌보다 조금 더 큰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던 시절이 되어버렸고, 사실과 논거에 기반을 두지 않는 어설픈 논리는 몇 분도 안되어 반박 논리에 바보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아직도 그 환경을 직시하지 못하고 한두 달이면 잊힐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찻잔 속의 태풍이 세상의 전부 인양 어떻게 기대서 몇 푼 벌어오는 것을 거들먹 거리며 세상을 호도하고 있다.

역시나…

세상의 진실에 가까이 가는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어리석은 자의 금고에 빨때를 꽂아서 단물을 삼키고 있는 자들이 아닐까 싶다.

궂이 몇 십만, 몇 백만 부 이상 팔리는 책과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물론 그 책이 문제라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땅에 새겨진 한국건축이 모두 내 것이던 내 것이 아니건 자랑을 하려거든 제대로 알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이야기들 중 진실만을 가려듣거나, 진실을 찾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우물안 개구리를 넘어 짚을지고 불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과 뭐가 다를까….

예나 지금이나, 미래나….

원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구도하는 자세로~

*****

–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 가운데, 거대한 기와지붕을 씌워 사찰 건축의 맥을 이었다고 자족하거나, 제국주의적 열주를 세워 종교의 숭고함을 재현했다는 강변, 완자 살창을 달아 한국적 주거공간을 만들었다는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한지, 무의미한 노력인지를 식상하리만큼 겪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 곁을 떠돌고 있는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또는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미망의 안개는 걷힐 줄 모른다.

– 한국건축은 곧 집합이다.

– 병산서원의 집합적 형태는 안에서 바깥으로 나타난다. 즉 외부에서 내부로 진입하면서 나타나는 형태는 매우 단절적이며 독립적이지만,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형태는 연속적이며 중첩적이다. 병산서원의 집합적 형태는 따라서 외형적이다. 안에서 바깥으로 향하는 건축 형태를 가진 것이다.

– 병산서원은 뿌리 깊은 정통성 시비에 휘말려왔다 1620년 서애의 위피는 안동 동쪽의 여강 서원으로 옮겨진다. 여강 서원은 원래 퇴계의 위폐를 봉안한 곳인데, 퇴계파들은 서애와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함께 봉안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퇴계학파의 본산을 조성하려 했다. 장연히 중앙에 퇴계의 위패를 모셨지만, 문제는 서애와 학봉 중 누구를 앞선 순열로 모시는가였다. 이는 서애파와 학봉파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 되었고, ‘병호시비’라 불린 논쟁과 갈등은 아직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학봉파와의 9년에 걸친 동거를 청산하고 서애의 위패는 1629년 다시 병산서원으로 옮겨진다. 이를 복향이라 하며, 이때 서애의 조카인 수암 류진의 위패를 같이 모셨다. 지금도 사당 안에는 중앙에 서애의 위패가, 동쪽에 수암의 위패가 놓여있다.

– 국가가 인정하는 병산서원이 사액서원으로 승격된 시기는 매우 늦어 1850년대에 들어서였다. 이는 창건 후 200년간 병산서원의 정치적 위상이 높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라이벌인 호계서원이 1676년 사액된 점과 비교하면 퇴계파의 정통성은 물론 정치적인 주도권도 학봉파가 장악했다. 이는 병산서원을 철저하게 견제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근세까지 당쟁의 주역에서 벗어나 있었던 역사가 서원의 건축을 더욱 짜임세 있게 만들었고, 또한 초기 교육기관으로서의 건강한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인이 된다.

– 흥선대원군이 18세기 후반 대대적인 서원철폐 당시 병산서원은 보존 대상 47개소에 들어 보존되었지만, 당쟁의 근원지였던 호계서원은 철폐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건축사적인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 병산서원의 교수진은 20명 내외 입학자격은 엄격, 입학 후에는 정해진 수학기간이 없고 철저하게 능력별 교육, 어느 시대나 부도덕한 교육기관은 존재하기 마련 능력별 졸업제를 악용해서 졸업을 계속 유보하면서 전체 학생 수가 수백에 달하는 서원들이 속출. 서원에 적을 두면 세금과 공역의 의무에서 면제되었기 때문. 1710년 전국의 서원 학생 정원을 일괄적으로 사액서원은 20명, 비사액서원은 15명으로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일반 서원의 기숙사인 동,서재의 규모로 보아 수용인원은 20명이 적절. 그러나 제한 역시 유림 세력들의 뿌리 깊은 관행으로 유명무실.

– 병산서원의 학생수는 많을 경우 92명, 적게는 7명에 이른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20~30명의 수준. 완전 기숙을 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고, 가까운 거리에서는 통학을, 그 외의 학생들은 서원 마을에서 하숙. 지금의 대학의 거주환경과 매우 비슷하다.

– 서원의 명문도는 얼마나 많은 목판을 소장하고 있느냐.

– 불교건축의 외형은 암시적이며 자연과의 일체를 꾀하고 있는 반면, 유교건축인 서원은 폐쇄적이며 인위적이다.

– 병산서원의 재미있는 규정 가운데 과거 급제자들의 환영 잔치는 광대패들의 유희는 절대 서원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만대루 바깥에서 연희를 벌이게 하라는 것.

– 의상의 인기는 가장 높아서 그가 창건했다는 사찰이 줄잡아 100여 개소가 넘지만, 대부분은 사찰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 위해 나중에 가식 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의상이 창건한 사찰은 양양 낙산사와 부석사뿐이고, 유명한 화엄십찰 마저도 대부분 의상의 제자들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낙산사는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그리고 2005년의 큰 산불로 여러 차례 불에 타버려서 의상의 채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부석사가 유일하다.

– 의상은 매우 정치적인 인물. 젊은 시절 두 차례에 걸쳐 당나라에 유학시도. 첫 시도인 650년 아직도 세 나라가 대립하던 시기에 과감하게 고구려를 통해 중국으로 건너가려고 밀입국하였으나 곧 고구려 군에 붙잡혀 신라로 호송되었다. 이때 동행한 동료가 바로 원효대사였다. 굳이 고구려를 거치는 육로를 택한 이유도 정치적 첩보활동에 목적이 있지 않았나 싶다. 10년 후인 661년, 백제 멸망 직후에 경주에 왔던 중국의 사신을 따라 드디어 중국 유학의 꿈을 이루게 된다. 왕권의 비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국가의 공식 유학생이었던 것이다.

– 부석사 창건은 통일 직후 신라에 있어서 매우 정치적인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비록 통일 전쟁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이후 신라 왕권의 영향력은 소백산맥 이남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특히 당시에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의 반항이 아직 수그러들지 않았던 혼란기였다. 그리고 부석사의 입지가 옛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 관문이었던 죽령 일대를 경영할 수 있는 곳임을 되새겨본다면, 부석사의 창건은 바로 신라 국경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을 확보한 것으로 해석 가능, 동해안 국경선 낙산사도 동일 추정.

– 비켜선 석등의 위치는 무량수전 중심선에서 50센티미터 정도 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중앙에 놓았을 경우 안양루를 막 올라온 흐름과 맞닥뜨려 답답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쪽으로 비켜 섬으로써 얻게 된 더욱 큰 효과는 참배자의 흐름을 동쪽의 빈 공간으로 유도한다는 점이다.

– 절집에서 도로를 포장하는 것은 불교가 경쟁력을 가졌던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방법이고, 조선시대 산사에서는 거의 쓰이지 못 했다. 고려시대 사찰이라도 극히 중요한 통로만 포장했음을 상기한다면, 비틀린 석탑과 함께 조사당에 이르는 산길의 포장은 매우 의도적인 결과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 범종각은 전면으로는 팔작지붕, 뒷면 안양루 쪽으로는 맞배지붕.

– 삼국시대에 세 나라가 앞다투어 불교를 수입한 것은 외래 종교에 심취해서가 아니라 가장 고등한 문화를 수입하고 고대 왕국의 체제를 구축하려는 사회적 욕구 때문이었다. 의상과 원효는 당대의 고승이었지만, 동시에 첨단의 지식인이었고 새로운 문화의 전파자였다.

– 불교의 교리는 엄청난 양의 경전에 의해서 전해졌지만, 일상적 포교는 문자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다수 민중들이 문맹이었던 상황에서 경전은 몇몇 학승들의 차지였다. 대중의 직접적인 신앙 대상은 불탑과 불상과 불화였고 더 나아가 그것들을 종합한 사찰건축이었다. 불교의 조형예술은 가장 적극적인 포교의 수단이었으며, 동시에 1차적인 신앙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불교문화의 최대 장르는 당연히 조형예술인 회화와 조각, 공예와 건축일 수밖에 없었고, 문자를 매개로 하는 문학은 그 근원성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발달하지 못 했다.

– 불교건축은 매우 복합적이다. 불교사원은 기본적으로 대중을 위한 예배소로서의 기능과 승려들을 위한 수도원의 기능을 갖는다. 고려시대에는 여기에다 지역사회 문화 중심으로서의 역할까지 부가되었고, 교통 중심으로서의 여관과 시장의 기능도 담당하였다.

–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에 창건되었다. 창건주인 자장은 본격적인 계율학의 시조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왕권이 필요로 했던 것은 강력한 질서와 사회적 율법을 구축할 수 있었던 계율학 계통의 불교였다. 자장 이전에도 이미 원광법사는 ‘세속오계’라는 사회적 계율을 주창하고 있었지만, 사상적 교리적 체계를 제공한 것은 자장.

– 계율승 자장이 경주가 아닌 변방 양산에 불보사찰 통도사를 개창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양산 지방에는 이미 중앙정부에 다음가는 무시 못할 세력 집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제압하기 위해 통도사를 개창했다는 정치적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강력한 후원자였던 선덕여왕이 세상을 뜨고, 신라의 권력은 김춘추 세력이 장악하여 정치사회적 체제가 완비됨에 따라 자장의 이용가치는 없어지고 말았다. 이후 교단의 중심은 의상 계열의 화엄파로 이동하였고, 고려조까지 계율학파인 남산종의 전통을 유지했던 통도사는 더 이상의 발전이 없었다. 통도사가 일약 교단의 중심이 된 시기는 고려 말인 1200년대. 무신의 난을 통해 집권한 고려의 무신 지배층들은 기존의 중심 종파인 화엄종을 배척하고 새롭게 형성된 조계종 등을 후원하였으며, 그 틈새에 남산종 통도사도 다시 부활의 기회를 잡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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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3 / 김봉렬 글 / 이인미 사진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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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이상건축』에 3년간 연재된 내용을 출판. 역사 속 건축에서 기술이 아니라 건축가들이 고민했던 생각들과 그들이 도달했던 깨달음과 성취, 그 실천의 결과로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는 ‘이 땅에 새겨진 정신’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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