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일본에 살다 – 김시중 지음, 윤여일 옮김 / 돌베개

글쓴이 조통 | 작성일 2016.8.11 | 목록
김시종 지음 | 윤여일 옮김
분류 절판도서
발행일 2016년 4월 3일 | 면수 316쪽 | 판형 변형판 145x205 | 장정 소프트커버 | 가격 15,000원

부제 : 재일 시인 김시종 자전

세월이 아주 많이 흘러서 후삼국 / 고려 / 조선 / 일제 / 남북분단시대 순으로 일컬어질 조선반도의 일제 강점기 막바지부터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통해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도입기의 세월을 온몸으로 체험한 재일 시인의 자전.

황국 소년으로 살았던 강점기와 얼떨결에 맞이한 해방공간 그리고 뜻하지 않은 분단과 4.3사건 그리고 조선전쟁이라는 그 치열한 핵폭탄 급 태풍의 눈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 태풍과 대립하거나 혹은 거슬러 올라가거나 휘몰아가는 존재의 이야기가 아니라, 메가톤급 태풍에 이어 온 비바람에 시달리는 나약한 한 개인으로 마주하며 온몸으로 태풍과 씨름하면서 그 태풍의 생성과 확장 그리고 소멸을 함께한 이야기.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태풍이 완전히 소멸되었다고 판단되어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보고 책을 내고 번역을 했다.

그 자전적 이야기를 이재야 꺼내서 책으로 펴낸 이유는 여태껏 저자의 마음속에 남북 분단으로 대치 중인 상황에 따른 자신의 과거 남로당, 공산당이라는 이력의 꼬리표 때문에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이제는 말할 시점이라고 생각했는지 담담하게 그려낸 내용을 번역해서 한국에서 출판.

끔찍했었을 기억들은 머리에서 지우고 싶었을 것이고 그 지워진 기억은 자기 방어기전의 발동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안위가 아직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한 말해서는 안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과거로 품고 있다가, 이젠 말할 수 있다는 시점이 도래하였고, 반드시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그로써 남겨야 한다는 책임감이 교차하자 비로소 꺼내 풀어 놓는 아픈 이야기들.

그 말 못할 사연은 남로당 연락책이었던 자신의 신분은 이후 군사정권이 강변한 북의 지령에 의한 폭동임을 간접 증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고, 부모와 가족 그리고 조국을 버리고 홀로 도망 나왔다는 죄의식, 일본으로의 밀항은 불법 체류로 인한 강제 송환 등이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부모(생전에, 58년 부, 60년 모 사망)가 제주에 살아서는 볼모로, 죽어서는 성묘도 못가는 자신의 형편과 일가 친적들에게도 연좌로 연루되어 피해가 갈 수 있었다는 많은 걱정들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는 ‘가시 돋친 밤송이 가시 같은 기억들”이라 기억할수록 상처가 나는 기억들을 가슴 깊이 묻어 두었다가 60여 년이 지나서 86세에 꺼냈는데 여전히 그 가시들은 살아서 어제 일처럼 세부사항이 생생하게 기억이 되살아나 선명한 이야기가 되어 우리에게 들려준다.

온전한 해방이 아니라 점령국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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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그 정감 많은 일본의 노래에 푹 싸여 모난 데 없이 신생 일본인인 황국 소년이 되어간 자였습니다. 식민지 통치가 악랄하고 혹독한 것이었음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나, 인간이 바뀐다는 것은 그러한 가혹한 폭압과 강제가 작용해서라기 보다 오히려 가장 심정적인, 극히 일상 차원의 다정한 정감 속에서 그리 되어선 안 될 자가 그리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그 견본 같은 소년이었습니다.

– 서울에서는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국 주류군이 이미 군정을 시작하여 9월 6일 막 건국을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대통령 여운형)’은 부인당하고 신정권을 만들어낸 민중조직인 인민위원회에도 해산령이 떨어졌습니다. 그처럼 본토의 정세가 긴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진 제주도에서는 9월 28일에야 비로소 소수의 미국 장교단 선발대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들이기 위해 항공로로 왔습니다.

– 군정이 이 섬 제주도에 미친 것도 제59미군중대가 도착한 1945년 11월 10일부터이니, 해방으로부터 3개월 남짓은 인민위원회가 "도에서 유일한 정당, 일체의 범위와 목적상 유일한 정부"(『주한미군사』,1951)로서 제주도 사회에서 확고한 기반을 쌓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이었지만, 징병징용으로 징발되었던 3만 이상의 젊은이를 포함해 총 6만여 명의 제주도 출신자가 2~3개월 동안 잇달아 귀환하면서 도민 인구는 한꺼번에 29만 가까이로 늘어났습니다.

– 해방군이어야 할 미군이 진주해와서는 간신히 ‘해방’을 얻은 남조선에 군정을 펼치고, 미 점령군 사령관 하지 중장의 성명(9월 9일)으로 조선총독부의 기능과 권능을 그대로 답습해 관리의 신분마저 보장하자, 친일파, 민족반역자로 추궁받아 몸을 숨기던 무리까지 원래의 직책으로 복귀해 활개를 쳤습니다. 정재계에서부터 사법검찰은 말할 것도 없고 교육계와 문화예술계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에 구체제가 도로 소생한 것입니다. 참으로 주인만 미국으로 바뀌었을뿐인 남조선의 ‘해방’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맞닥뜨린 민중의 반발은 군정청의 예상을 아득하게 넘어서는 파도가 되어 물결쳤습니다. 광주에서도 연일 인민위원회를 지지하는 대중과 학생, 청년들이 군정청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며 "미군은 나가라!"하고 똑똑하게 외쳤습니다.

– 제주도 4.3 사건의 앞장에 위치하는 극우단체 ‘서청(서북청년단)’의 극심한 횡포였던 ‘빨갱이 사냥’테러 또한 원인을 밝히자면 북조선의 성급한 ‘민주개혁’으로 북조선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김일성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격앙된 원한을 풀고자 한 반동이었습니다.

– 양심적인 민족주의자마저 배제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민주개혁’은 분명 제도로서는 진전된 개혁이었습니다. 토지개혁과 중요 산업의 국유화, 또 남녀평등의 법제화까지 했으니 획기적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수단과 방법이 너무도 급격했습니다. 논의의 여지를 주지 않는 민족반역자, 친일파 처단, 지주에 대한 수하를 막론한 총추방, 민의를 묻는 과정이 일절 생략된 토지개혁은 “친일적인 대지주뿐만 아니라 근면과 검약을 통해 중소의 지주로 성장하던 프로테스탄트도 일거에 무너뜨려 북에서 남으로의 엄청난 인구 유출, 이른바 월남민의 증대를 초래”했습니다.(문경시.(문경수 『제주도 4.3사건』) 그 수가 80만 명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 월남자 대부분이 반공주의의 화신이 되어 경찰이나 우익단체의 선두에 서고 제주도에도 지부를 만들어 도민을 마구잡이로 박해했습니다.

– 나아가 4월 20일을 전후해 단독선거 저지를 위한 직접행동을 감행해 각지의 선거사무소, 투표소를 덮쳐 선거 관리인을 살해하거나 시설을 파괴하는 일이 잇따랐습니다. 아울러 ‘산부대’는, 이는 이후 4.3의 비극을 참극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넌 사건인데, 투표 거부의 증거로서 마을 사람들을 대거 입산시켰습니다. 거기에는 가슴 아프게도 강권적 설득과 위협이 따랐습니다.

– 무장대의 공격은 이러한 군정경찰을 향했던 것입니다. 봉기라는 소란이 일어난 제주 사태를 두고도 경찰과 미군정은 북조선과 내통한 공산주의자의 폭동이라고 떠들어댔으나, 경비대는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사태를 예의주시했습니다. 치안 문제에 군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경비대의 원칙에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제주도 연대인 제9연대는 4.3의 제주 사태를 제주도민과 경찰 및 우익 서북청년단 등 간의 충돌로 인식해 처음부터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 딘 군정장관은 박진경 중령의 부임에 맞춰 수원 제2연대의 1개 대대를 제주로 파견하여 기존의 제 9연대, 부산 제5연대와 합쳐 세 개 대대의 대군력을 “우리나라의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라면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상관없다."라고 취임사를 밝힌 박진경 연대장의 지휘 아래로 배속했습니다.

– 인생은 짧다고들 합니다만 하루하루로 끝없이 이어지는 일생은 정말이지 잡다하게 깁니다.

– “인간이 그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자신의 사상을 갱신시키는 듯한 의미를 갖는, 토지라든지 풍경이라든가 하는 것과 우연하게라도 만나는 것은 선망의 가치가 있다.” / 『시론 時論 -오노 도자부로 小野十三郞』

– 가시 돋친 밤송이 껍질 같은 기억이라 닿기만 해도 상처가 나서, 생각해내지 않으려고 노력해 마음 깊숙이 묻어두었던 기억입니다. 그 탓일까요, 원상原象은 엷어지지도 않고 차례차례 프레임을 넘기듯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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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본에 살다 – 김시중 지음, 윤여일 옮김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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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국인 김시종 시인이 일제 강점기에 조선반도에서 태어나, 해방 이후 제주도에 살면서 발생한 4.3건으로 부모와 고향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와서 살아야만 했던 해방공간 속의 생존기에 가까운 기구한 삶의 회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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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저자는 전문을 ‘~습니다. 입`니다’의 경어체로 구성했다. 되돌아보면 수만은 회한과 반성과 자성으로 독자에게 그곳에서 그 과업을 완수하지 못 해서 미안하다, 죄송하다 말하는 듯하다.

원제는 『朝鮮と日本に生きる――済州島から猪飼野へ』 (岩波新書) 新書 – 2015/2/21 金 時鐘 (著)일본판에 씌여진 부제는 日韓のはざまに生きた詩人の稀有の回想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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