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평전 – 최석태 지음 / 돌베개
“1956년 9월 6일
서울 서대문 교차로에 있는 적십자병원에서
돌보는 이 하나 없는 가운데
이중섭은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이 평전의 서문 첫 줄이다.
평전은 대부분 언제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자라서 어떻게 생을 마감한다라는 편년체로 시작하는데 『이중섭 평전』은 그의 생의 마지막을 먼저 썻다.
그만큼 그의 생에는 우여곡절이 많았고 비극적인 결말이었다는 것을 이 첫줄로 웅변한다.
첫 줄 만큼이나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을 담았다.
지금껏 그의 삶의 처절함은 진행형.
그의 작품 “흰 소”, “길 떠나는 가족”, “황소” 등 숱한 작품을 남겼으나 그의 생에 전반을 흐르는 그에 대한 평가는 최근까지도 지극히 낮았던 때문.
최근에는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흩어졌던 그의 작품들도 많이 모여 전시회도 자주 열리고 있다.
1916년생인 그는 20세가 되는 시점인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40세에 사망한 해인 1956년까지는 대한민국 또한 강점기 막바지와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의 혼란 중에서도 대 혼란기의 한가운데 호랑이 굴에 닭 한 마리 던져지듯 내던져졌었다.
그 시점, 이 천재적인 예술가는 제대로 된 전시회나 작품에 대한 품평을 받아보기는커녕 처자식이 있던 일본과 떨어진 한국의 어느 작은 병원에서 혼자 쓸쓸히 세상에 등을 돌렸다.
올해는 2016년으로 그의 탄생 100년되는 시점.
그의 백 년에 맞춰서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2016.06.03~2016.10.03>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이 책과의 인연은 우연에 가깝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해, 여름이 일찍 시작되어 무지하게 덥던 7월 초 어느 주말 파주 출판단지 행사와 헤이리에서 오래 만나지 못한 출판사 사장과 약속이 있어 길을 나섰었다.
가끔씩 파주 출판 단지를 갈 때면 약속시간보다 좀 일찍 출발하거나 마치고 시간을 여유 있게 해서 <지혜의 숲>에 들러서 쓸만한 책들이 있는지 스캔을 하고 형편이 어려운지라 출판단지 내의 헌책방 그리고 몇몇 맘에 드는 인문학 출판사들을 고정적으로 들러 책을 사곤 한다.
당시 서점을 돌다가 집사람이 붙들어 인연이 된 책 중의 한 권으로 서가에서 두 달 정도 잠자고 있었다…
“ 그렇지, 이중섭 선생 평전을 언젠간 봐야지…” 했는데…
운명인지 필연인지….
그의 평전을 내가 읽으려 처음 잡은 날이 2016년 9월 4일로 탄생 100주년 사망 60주기 이틀 전이고, 전시도 딱 한 달이 남은 날이었다.
그가 태어난 날이 1916년 4월 16일,
그가 생을 마감한 날이 1956년 9월 6일,
그의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 2016년 6월 3일 ~ 10월 3일까지….
물론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을 이 평전을 읽던 중에 알았다. ㅠ.ㅠ
2016년 10월 3일이 그의 전시회가 마감되는 날이라 알뜰하게 챙겨 읽고 곧 다녀올 예정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나..
평전을 읽어 보는 수고는 해야 눈이 아닌 마음으로, 가슴으로 울림 있게 볼 수 있다….
늘 말하지만 아는 만큼 딱 그 만큼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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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9월 6일 서울 서대문 교차로에 있는 적십자 병원에서 돌보는 이 하나 없는 가운데 이중섭은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 중등학교 시절부터 스승 임용련에게 “미래가 예약된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 보호자가 없었으므로 연고자를 찾는 신문 공고가 나갔으나 정작 그의 죽음이 알려진 건 죽은 지 사흘 후, 이중섭이 죽은 사실을 모른 채 병원에 들렀던 친구 김병기에 의해서였다. 그제야 비보를 접한 친구들과 조카 등 100여 명이 모여들었고, 이에 놀란 병원 측은 “이렇게 유명한 분이 왜 그토록 쓸쓸하게 죽어야 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라고 토로했다.
– 이중섭은 높은 기량과 구상을 지닌 미술가로 일찍부터 인정받았으나 5.15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급작스럽게 바뀐 그 시대의 미술관은 그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식민지 시대는 물론이려니와 해방 후에도 이중섭의 예술혼은 억압당했다.
북한은 소련군 문화정책에 연원을 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비좁게 적용하여 창작 영역을 제한했고, 남한은 미군정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밀려들어온 미국식 추상화풍이 휩쓸면서 민족 풍격이 강한 이중섭의 그림을 시대착오적인 것인 양 내몰았다.
또한 이중섭은 일제 때 식민 본국에까지 충격을 준 기린아였던 데다가 뒤늦은 월남민이었으므로,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이나 기득권을 차지한 인사들이 그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으리란 것도 상상할 수 있다.
– 이중섭의 작품들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져 있어 특별한 계기를 맞기 전에는 그 전모는 커녕 편린조차 맛보기 힘들다.
– 이중섭은 5.15 이후는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자신의 작품에 반드시 한글로 서명했다.
– 세종대왕 시대에 쓰시마 정벌로 이름난 이종무 장군을 시초로 하는 아버지 이희주와 어머니 안악 이 씨 사이에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양반이지만 무반 계통이어서 그다지 번성하지는 못 했던 것으로 여겨짐
– 이중섭에게 피카소의 영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이었으며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루오는 이중섭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 마사코와 사랑에 빠진 이중섭은 1940년 말부터 관제엽서의 한쪽 면에 그림을 그려 그녀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이 엽서 그림은 1940년 1점으로 시작하여 1941년에는 80여 점 가까이 집중적으로 그려졌고, 1942년 10점 안쪽으로 급격히 줄었다가 1943년에는 2점에 그치며 끝이 났다. 이렇게 햇수로 4년 동안 그려서 보낸 사랑의 엽서 그림은 100여 점에 이른다.
– 이중섭은 그를 눈여겨보았던 이쾌대의 권유로 조선신미술가협회에 참여.
– 이 무렵 이중섭과 어울렸던 화가 김영주는 이중섭이 학도병 나가기를 권유하며 다니는 이광수, 최남선을 비꼬아 ‘쑥대머리 까까중’이라 했으며, 그런 중도 아닌 중들이 싫어서 자신의 이름자에 있는 ‘중’을 ‘둥’으로 바꾼다고 장난치듯 말했다고 한다.
– 이중섭과 마사코는 전통적인 조선옷을 입고 결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아내의 이름을 마사코에서 이남덕으로 바꾸었다. 일본의 창씨개명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이었다.
– 원산에서 이중섭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소를 그리기 위해 하루 종일 소를 이리 보고 저리 보다가 소에 받치기도 하고 소 주인에게 소도둑으로 의심받아 잡혀가기도 했다. 가끔은 평양에서 양명문이나 김병기를 만나 김병기 집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 이중섭이 좋아한 건 역시 백자류였다.
– 8.15해방을 맞은 지 9개월 만에 북한에는 토지가 재분배되었으며 지주제가 사라졌다. 일본 통치의 종료와 더불어 사라져야 할 것을 여긴 유제가 청산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중섭네 또한 막대한 토지를 잃었다. 그러나 다른 자산을 몰수당하거나 추방당하지는 않았는데 이는 전혀 반민족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이 즈음 첫아들이 태어났다. 어려운 연애 시절을 거쳐 결혼한 그들로서는 너무나 기쁜 일이었으나 그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곧 죽고 만다. 이중섭은 죽은 아들의 관 속에 여러 장의 그림을 넣어주면서 혼자서 외로울 테니까 이거라도 가지고 놀라고 하였다. 구상의 회고에 의하면 이 그림은 복숭아를 들고 노는 어린이 그림이었다 한다.
– 일본여자와 결혼한 조선인 남자들이 해방 후 처와 아이들을 팽개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 8.15해방 직후 이중섭이 최재덕과 함께 미도파백화점의 실내에 벽화를 그린 사실은 앞서 소개했다. 북한에 살던 이즈음 이중섭은 벽화를 매우 그리고 싶어 했다고 한다. 평양 일대는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까닭에 곳곳에 고구려 고분이 많았다. 벽화를 그리겠다는 이중섭의 열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작은 규모라 해도 크게 느껴지는 그의 그림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유사한 조형요소가 자주 등장하는 등 그가 고분벽화로부터 받았을 영향이 감지된다.
– 이중섭은 시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중섭은 내내 두보의 시집을 끼고 다녔다고 한다.
– 1947년 8월 평양에서 열린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출품한 그림은 소련인 평론가에게 유럽의 어떠한 대가들에 비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미술가라는 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다른 미술전에서 모스크바에서 온 평론가는 이중섭의 작품을 ‘인민의 적’으로 지적하기도 함.
그들은 “이 화가는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처럼 천재에 속한다. 그런데 천재처럼 위험한 존재는 없다. 왜냐하면 노력에 의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어디까지나 인민의 봉사자이며 선량한 지도자로서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 화가의 그림은 인민에게 공포감을 주며 사물을 정직하게 그리지 않고 자기 주관에 의해서 과장하기 때문에 기만하고 있다."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당시 소련에 성립되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다.
– 이 무렵 이중섭은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사귀게 되었다.
– 1950년 6월 전쟁 직후 10월 25일, 중국이 대규모 인민 지원군 부대를 투입과 무차별 폭격으로 어머니의 강권에 따라 이중섭은 남으로 피난. 자신의 그림 중 잘된 그리만 챙겨 나오다 어머니와 형수, 조카들을 남겨두고 떠나가는 마당에 그림만은 챙겨 넣었던 자신이 죄스러워 그림 뭉치를 어머니에게 넘겨주면서 이 그림을 아들로 여기고 잘 보관하라고 말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장판 한 쪽을 뜯어가지고 나왔다. 이중섭이 아내와 두 아들, 조카 영진과 함께 작업 중이던 풍경화 한 점만을 들고 피난길에 나선 그날은 1950년 12월 10일.
– 국군은 원산항에 배를 대어놓고 배에 태울 사람 명단을 비밀리에 작성했는데, 이중섭 일행은 그 명단에 들어있지 않았지만 여러모로 애쓴 끝에 운 좋게도 국군에 배속된 화물선에 탈 수 있었다.
– 제주 피난시절은 이후에 이중섭의 부인은 힘겨웠던 시절이었지만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어서 행복했었다고 회고.
– 이 무렵(제주도 서귀포 피란 시절)은 이영진에게, 유학시절 부산에서 원산으로 올 때 기차에서 본 소는 눈빛이 고왔는데 전쟁으로 온 국토가 어지러워지자 소들의 눈빛도 어지러워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훗날 통영에서 같은 방에 기거하게 되는 이성운에게는, 제주도에서 본 소들은 전쟁 전 소처럼 안정감이 있고 눈빛도 순수해서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으며, 자신의 소 그림은 제주도에서 큰 틀이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 이중섭은 제주섬에서 초상화도 그렸다.
– 이중섭이 평생 동안 그려오던 소 그림은 통영에서 완성되었다. 그의 말 그대로 서귀포에서 그렸던 수많은 소의 습작을 토대로 드디어 통영에서 맘에 드는 소 그림을 완성한 것이었다.
– 이중섭의 심적 상태를 걱정한 구상은 이중섭을 성가병원에 입원시켰다. 병원에서 이중섭은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그때가 1955년 7월로, 이중섭은 이 병원에서 한 달여 동안 입원하였다. 입원해 있는 동안 이중섭은 음식을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정신과 치료에 대한 거부 태도일 수도 있고, 먹는 것을 자포자기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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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이중섭을 바라보는 관점 네 가지
첫째, 동화주의가 극성이었던 일제강점기 말기에 변함없이 한글로 서명을 한 데서 알 수 있듯 이중섭은 자주적인 태도가 누구보다 확고했다.
둘째, 이중섭의 친필이 담긴 엽서와 편지를 통해 전통적인 서예문화를 계승하고자 했다.
셋째, 이중섭은 기법뿐 아니라 소재에서도 많은 탐구를 거듭했다.
넷째, 억압에서 자유를 거쳐 전쟁으로 이어진 끊임없는 격동의 시대, 혼돈의 사회를 살다 간 화가이며 이런 격동과 혼란을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표현하는데 성공한 화가이다.
적어도 이중섭은 자신이 속한 시대와 사회의 현실을 실감하며 살았고 자신의 체험과 상황을 여실히 표현하고 그릴 줄 알았다.
그 혼돈의 시대를 이중섭만큼 보람차게 산 예술가가 달리 없다고 해도 될 만큼 그는 치열하게 살았다.
이중섭 평전 – 최석태 지음 /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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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의 한반도를 처절하게 살면서 시대를 가장 잘 대변하는 천재 작가였으나 혼돈의 시절 탓에 대우는 커녕 치열하게 살다간 그의 질곡한 삶과 생이 녹아 있는 그림들을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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