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나 인간일 뿐이다

글쓴이 이연경 | 작성일 2005.2.2 | 목록
발행일 2004년 7월 5일 | 면수 352쪽 | 판형 국판 148x210mm | 가격 11,000원

청상과부의 흰 소복과 은장도, 시부모와 남편을 공경하는 한복 입은 여인, 열녀비. 조선시대의 여인은 이렇게 한 줄로도 정리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해 보인다. 그리고는 진절머리를 치게 된다. 그 시대에 안 태어나서 너무 다행이야 하고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같은 교복, 같은 머리를 한 같은 학교의 여학생들도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너무 간과한 것일까?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조선시대가 요구했던 겉모습은 비슷했을지언정 한꺼풀 벗겨진 그들의 속모습은 십이폭 병풍처럼 너무도 다채로웠다.
갇혀진 만큼 그들의 꿈은 더욱 꿈틀거렸을지도 모른다.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은 조선 초기에 비교적 자유와 권리를 누린 시대를 살았다고는 하지만 문밖 출입이 거의 봉쇄돼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담 밖의 세계를 보고, 발로 직접 돌아다니고 싶은 욕망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출해야 했다. 그 결과 신사임당이 그린 그림은 새가 날아오다 부딪혀 죽을 정도로 생생함을 띠게 되었고, 가지며 호박, 포도를 그린 그림은 정물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지금도 자라고 있는 야채를 보는 것 같은 경지에 이르렀다. 더구나 그 야채들은 따뜻한 햇살과 흙을 머금고 있는 듯 온기마저 품고 있다. 이 얼마나 하찮고,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신사임당은 금강산에 올라 진경산수화를 그리는 대신 뒷마당의 야채를 수없이 소묘하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허난설헌은 그림을 그리는 대신 신선의 세계를 꿈꾸며 시를 짓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조선시대에 시작에 힘쓴 여인은 꽤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를 지음으로써 그들은 경계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세계를 만들 수 있었다. 이것은 허난설헌 같은 양반뿐 아니라 신분 때문에 설움받아야 했던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녀로 태어난 재주 많은 여인들은 차라리 문재 높은 양반의 소실이 되거나 기녀를 자처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이런 소실이나 기녀 다섯이 모여 일종의 문학서클인 삼호정을 만들어 서로의 시를 교환하고 풍류를 즐기는 모임이 있었다. 이 특이한 모임은 사회에서 소외된 재주 많은 여성들의 소통의 구실을 했음은 물론이다.

“상자 속의 시 구절 누구와 화답할까. 거울 속의 여윈 모습 도리어 가련할 뿐. 스물세 해 무엇을 했던가. 절반은 바느질, 절반은 시를 쓰며 보냈으니”

이 시는 그 모임의 한 명이자 스스로 반벙어리란 뜻의 반아당이란 호를 칭한 여인이 쓴 것인데 그녀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동료들과 소통하기를 바랐는지 절실히 알 수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 여인들은 시작을 하기도 했고 남몰래 학문에 힘쓰기도 했다. 그들의 모습이 어찌 한 가지겠는가? 허난설헌처럼 세상을 원망하며 요절하는가 하면 집안에서 자리를 잡고 인정받으며 살기도 했다. 부녀의 길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겨 시집가자마자 처녀 절 닦았던 학문을 버린 여인도 있는 반면 평생 성리학을 연구해 철학서를 남긴 여인도 있었다. 얌전하고 헌신적인 부녀가 되라는 외부의 압력은 같았지만 이들이 거기에 반응한 방법은 그들 하나하나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내면을 ‘증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정보’는 넘쳐나지만 ‘증언’은 매우 드물다. 매스컴은 모든 것을 전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남자들이 쓴 열녀문이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효행에 뛰어나고 삼강행실도에 힘쓴 여인이 시집간 후 남편이 죽거나 난리가 터져 지조를 지켜야 할 순간이 오면 주저않고 목숨을 끊음으로써 인간의 도리를 다했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회의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 있던가? 풍양 조씨라는 여인은 남편이 새파란 나이로 죽자 따라 자결하고자 했지만 두려움과 친청 식구들에 대한 염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열녀가 되고자 했으나 실패하기까지의 심정과 과정을 세세한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것이 백 가지의 열녀문을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진정성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매스컴’에 맞선 ‘증언’의 힘을 보여준 것이다.
수백년에 걸쳐 세계 어디보다도 강한 여성 억압을 경험해야 했던 조선. “조선에 태어난 게 내 첫 번째 한이요, 여자로 태어난 게 두 번째 한이요, 김성립의 아내로 태어난 게 세 번째 한이다”라고 말해야 했던 여인이 허난설헌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남자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며 금연을 시작할 때 여자는 나라의 백성이 아니냐며 패물과 쌀을 모으는 여성 중심의 국채보상운동을 해 나간 것을 보면 조선이란 거대한 권력도 결국 이들의 기개를 꺾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조선 여성에 대해 다른 이미지를 가져보려 한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낮동안 분주하게 집안일을 하는 여인. 해가 지자 어른들께 인사하고 별채로 들어와 보자기에 쌓아둔 책을 펴고 전날 읽다 만 구절의 뜻을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뜻이 풀리거나 자기만의 생각이 떠오르면 혼자 씩 웃기도 했을 것이다. 때로는 너무 외롭고 자기 생각을 말할 곳조차 없어 답답하지만 한 장 한 장 적어둔 종이는 상자에 모두 모아놨을 것이다. 죽기 전에 모두 태우라는 쓰라린 유언을 남겨야 하기도 했겠지만 간혹 좋은 이해자를 만나 함께 생각을 나누고 분발하기도 했으리라. 여성에겐 암흑의 시대였지만 누구나 그 암흑에 몸을 낮춘 건 아니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우리들의 조상인 그녀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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