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

홍대용의 북경 기행 새로 읽기

김명호

발행일 2020년 10월 30일
ISBN 9788971999653 94810
면수 864쪽
판형 신국판 152x225mm, 양장
가격 45,000원
분류 돌베개 한국학총서
한 줄 소개
연암의 길에서 만난 담헌 홍대용, 5년간의 연구로 맺은 결실!
주요 내용

조선 근대화의 여명기에 홍대용의 북경 기행이 있었다

홍대용의 북경 기행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 조선 선비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은 장장 6개월에 걸친 북경 여행길에 오른다. 일평생 조선을 벗어나지 못했던 대다수의 조선인들에게 세계 문명의 중심지 북경을 관광한다는 것은 이루기 힘든 꿈이었다. 홍대용은 천금 같은 기회를 얻어 북경을 다녀왔고, 자신의 진기한 견문을 『연기』(燕記), 『간정필담』(乾淨筆譚), 『을병연행록』이라는 3부작의 여행기에 담아 세상에 전했다.

북경 여행기를 통해 홍대용은 전성기를 누리던 건륭제 치하 청 제국의 발전상을 꼼꼼히 관찰하고 생생하게 보고했다. 아울러 항주(杭州, 현 저장성 항저우시) 출신의 비범한 세 명의 선비인 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육비(陸飛)와 나눈 학문적 대화를 『간정필담』에 소개했다. 그리하여 그의 여행기는 당대는 물론 19세기 이후에도 널리 읽혔고, 김창업의 『연행일기』,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연행록(燕行錄)으로 손꼽혔다.

홍대용의 북경 여행은 그의 삶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그의 주위에 모여든 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 오늘날 ‘북학파’(北學派)라 일컫는 인사들에게도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쳐 ‘북학사상’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북학파 인사들은 홍대용의 여행기를 탐독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자극받아 잇달아 북경 여행에 나섰고 『북학의』 『열하일기』 등의 빼어난 저술을 통해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자고 역설했다.

이렇게 볼 때, 홍대용의 북경 여행기를 새로 읽는다는 것은 홍대용이라는 인물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물론이요, 조선이 근대문명을 접하고 근대화로 서서히 첫발을 내딛던 시기 일군의 학자들 사이에서 구가되던 북학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업이 된다. 하지만 종래의 연구에서는 홍대용의 사상 발전에 북경 여행이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고 전제하면서도, 정작 그의 여행기는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고 피상적인 논의에만 머물렀다. 이 책은 3부작 여행기 전부를 대상으로 하며(이본 포함) 면밀한 텍스트 연구를 기초로 해서 홍대용의 북경 여행기를 완전히 새롭게 읽었다.

한국사에서 근대를 거시적 관점으로 보면 250여 년 전 홍대용의 북경 여행은 그리 먼 옛날이 아니다. 청나라가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굴기하고 서양 열강이 선교사를 앞세워 동아시아 침략을 개시하던 그 무렵, 조선에는 거대한 시대적 전환을 예감하고 그 대책으로 사회 개혁과 사상적 혁신을 고민한 지식인들이 있었다. 홍대용은 이 시기의 선각자 중 한 사람이다. 근대화의 여명기로부터 오랜 암중모색과 시행착오를 거쳐 오늘의 한국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본다면, 홍대용의 북경 여행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은 현대 한국 사회의 형성 과정을 살피는 작업이 될 것이다.

 

 

홍대용과 항주의 세 선비, 고도의 지적 대화를 나누다

한중일 학계를 통틀어 항주 세 선비의 가계와 학맥에 대한 최초의 연구

 

조선 후기 실학사상과 실학자들에 대한 연구는 학계의 레드오션이라 할 정도로 많은 학자와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어 있다. 홍대용과 박지원이 대표적인 연구 대상인데, 그간 홍대용을 연구한 국내 대다수의 학자들은 항주 세 선비의 존재를 알지만 연구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혹은 수준 낮은 시골 선비 정도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나고 자란 항주는 당시 중국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장 발달한 강남 지방의 대도회였으며, 양명학과 고증학, 금석학, 문자학, 서지학 등 다양한 학문이 만개한 곳이었다. 더구나 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절강 향시를 통과해 북경으로 올라온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1만 수천 명에 달하는 수험생 중 94명을 선발하는 절강 향시에서 육비는 1등으로 합격하여 ‘해원’이 되었고, 반정균은 21등, 엄성은 69등으로 합격했다. 홍대용이 이들과 가까워진 계기는 실력 있는 학자이면서 동시에 이들이 과거 급제에 결코 연연하지 않으며 청조 치하에서도 옛 명나라를 잊지 않고 존모하는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다는 점 때문이었다. 홍대용은 이와 같이 비범한 중국 선비들과 깊은 우정을 맺고 당대 유행한 최신 학문까지도 두루 대화를 나누었다. 이 책에서는 육비와의 양명학 토론, 엄성과의 주자학 토론을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주자의 시경학에 대한 세 선비의 비판과 홍대용의 옹호, 주자의 주역관에 대한 견해 등을 정리했다.

홍대용과 항주 세 선비의 교유는 북경 여행의 하이라이트이면서 동시에 홍대용의 사상적 변화를 해명하는 관건이 된다. 이 책의 저자는 홍대용의 3부작 여행기 중 항주의 세 선비와의 교유 및 이들과 나눈 필담을 주로 기록한 『간정필담』을 집중 연구해 이들과의 고도의 지적인 만남을 다루었다. 뿐만 아니라 세 선비의 가계와 인맥, 스승 및 학문의 연원 등을 살펴 정리했다. 항주 세 선비에 대한 이처럼 자세한 연구는 이 책이 처음이다.

북경에서 귀국한 직후부터 거의 말년까지 홍대용이 청조 문인들과 주고받은 서신은 100여 편 이상이 현전하지만,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왕복 서신들을 주된 자료로 삼아 홍대용이 엄성·육비·손유의·등사민 등 청조 문인들과 나눈 일련의 학술 토론을 고찰해 본다면, 홍대용의 후반기 생애에 지속된 사상적 모색 과정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대규모 세심법’, 북학파의 청 문물 수용 논리를 마련하다

북학사상 논리의 기반

 

홍대용은 여행 전에 자신보다 40~50년 앞서 북경을 다녀온 김창업과 이기지의 연행록을 숙지했으며, 여행 중에도 휴대했다. 중국 도처에서 김창업의 『연행일기』를 여행안내서 삼아 꺼내 보았고, 이기지의 『일암연기』도 초록해서 지니고 다녔다. 노론계의 학통과 인맥을 감안하면, 홍대용이 이 두 사람의 연행록을 익히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이 이 두 사람의 연행록과 홍대용의 여행기가 많은 공통점을 보여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당시 조선에서는 반청(反淸) 감정이 여전해서 연행을 간 조선인이 청나라 관원이나 문사들과 사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고, 홍대용은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이 문제로 산림 학자 김종후와 반목하는 등 시달림을 당했지만, 그럴 때 홍대용은 김창업의 선례를 들었다. 자제군관 신분으로 여행에 나선 김창업도 이원영이나 마유병 같이 황제의 시위(侍衛) 벼슬을 한 만주인들과 거리낌 없이 교제했는데, 마찬가지로 자제군관의 신분인 자신이 중국인들과 사적으로 교유하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반문했다.

홍대용은 박지원을 상대로 북경 천주당의 파이프오르간에 대해 논하면서, 선배 김창업과 이기지가 탁월한 식견으로 중국을 잘 관찰하기는 했지만 이들의 연행록 중 천주당에 관한 기록만큼은 미흡한 점이 있다고 비판한 바 있다. 청나라의 발전상과 강희제의 업적을 예찬한 두 선배의 견해를 계승한 홍대용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강희제와 비교하여 옹정제와 건륭제의 사치를 비판했다. 저자는 청나라의 실정에 대한 관찰에서 홍대용의 북경 여행기가 김창업‧이기지의 여행기와 뚜렷한 공통점과 아울러 그보다 진일보한 인식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홍대용은 청 문물을 한마디로 ‘대규모 세심법’이라 정의한다. 물론, 홍대용의 북경 여행 전후에도 청 문물의 광대하거나 정밀한 특징을 통찰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지만, 홍대용은 풍부하고 다양한 견문을 바탕으로 청 문물의 근본 특징을 ‘대규모 세심법’이란 명제로 명확하게 요약했다. 그 이후 ‘대규모 세심법’은 북학파에게 청 문물을 파악하는 기본 틀로 받아들여졌다.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압록강을 막 건너 당도한 국경의 작은 고을인 책문의 번화함을 보자마자 홍대용이 말한 ‘대규모 세심법’을 상기했다고 한다.

홍대용은 청 문물이 실은 중화 문물이며, 『주례』에 구현된 ‘대규모 세심법’을 계승했다고 보았다. 중화 문물을 중국의 특정 왕조의 소산이 아니라, 고대의 성현들이 제작한 이상적인 문물제도로 인식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의 중화 문물을 보편적인 이상으로 설정하고 청 문물을 청 왕조와 분리하여 사고함으로써, 홍대용은 당시 조선의 지배적 이념이던 존명배청주의(尊明排淸主義)와 충돌을 피하면서 조심스럽게 청 문물 수용의 논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대규모 세심법’은 실학을 추구하던 이들에게 주요한 논리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북학사상을 조선 땅에 전파할 단단한 기반이 되었다.

 

 

연암의 길에서 홍대용을 만나다

 

이 책의 저자 김명호 교수는 연암 박지원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손꼽히는 학자다. 정년퇴직을 즈음하여 저자가 필생의 과제로 삼은 ‘연암 박지원 평전’을 집필하던 중 ‘홍대용’이라는 큰 산을 만났다. 박지원이 삼십대 중반에 홍대용과 처음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으로 북학사상을 품게 되는 대목에 이르러 그만 집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집필을 시작할 당시에는 홍대용에 관한 그간의 선행 연구를 바탕으로 이 부분을 순조롭게 쓸 것이라 예상했지만, 홍대용에 관한 많은 부분이 여전히 연구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박지원만큼 홍대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의 집필이 어렵다고 판단한 저자는 잠시 평전 집필을 멈추고 홍대용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2015년부터 시작된 홍대용 연구는 5년의 시간을 기울인 뒤에야 결실을 맺게 되었다.

홍대용의 생애에서 북경 여행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여행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의 생애는 두 시기로 나뉘는데, 전반기가 북경 여행을 위한 오랜 준비 기간이었다면, 후반기는 여행 체험을 충실히 기록하고 주위에 전파하는 한편 여행 당시 교분을 맺은 청나라 지식인들과 서신 교류를 지속하면서 사상적 전환을 모색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홍대용의 가계부터 조부와 부친의 행적, 초년 시절의 홍대용부터 노년의 홍대용까지 전 생애를 정리했다. 특히 부친 홍역이 환곡의 가분 문제로 유배형에 처해진 것을 두고 탐관오리였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건의 전말을 자세히 살펴 해명했다. 연암과 담헌의 관계를 왜곡하는 주장에 대해서도 북경 여행 이후 북학사상의 형성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었던 부분을 별도의 장으로 정리했다. 북학파와 북학사상, 그리고 후세대 사람들에 미친 근대화의 영향까지 모두 한 책에서 다루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홍대용의 평전 같이 여겨지지만, 홍대용의 북경 여행이 그만큼 전 생애에 걸쳐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젊은 시절 혼천의 등 천문기구를 만들고 존명배청에 철두철미했던 젊은 홍대용을 설명해야 했고, 귀국 후 집필 작업과 이덕무 박지원 등 북학파 학자들의 반향을 설명해야 했다. 이처럼 저자는 홍대용의 북경 여행과 이 시기 항주의 세 선비와의 만남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홍대용의 모든 것을 다루는 대작업을 했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전체 5부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 500여 쪽에 미주만 250여 쪽에 달하고 1300여 개의 미주가 달렸다. 매우 정치한 학술서지만, 일반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평전의 글쓰기 방식을 취했다.

 

1부 여행에 나서기까지

홍대용의 북경 여행에 대한 배경 지식으로, 여행에 나서기까지 어떠한 선비로 성장했는지 그의 전반기 생애를 살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난 홍대용이 과거 공부나 성리학에만 몰두하지 않고 일찍부터 ‘고학’(古學: 고대의 실용적인 유학)을 지향한 사실에 주목했다. 또한 홍대용 부친의 관직 활동과 밀착해서 천문관측 기구인 혼천의 제작 등 젊은 시절 홍대용의 폭넓은 학문적 탐구를 살폈다.

 

2부 청 제국의 수도에서

북경으로의 출발에 미쳐 친지와 우인들이 보인 반응과 홍대용 자신의 각오를 살피고 북경으로 여행하면서 그의 의식에 일어난 변화를 추적했다. 이어서 북경 체류 중에 홍대용이 자주 찾아간 천주당과 유리창을 중심으로, 서양의 선진적인 천문학을 탐문하고 당금의 연주법을 배우러 다닌 사실을 논했다. 홍대용의 혼천의와 거문고, 천문학과 음악에 대해 가졌던 관심과 조예가 북경 여행에서도 십분 발휘되었음을 볼 수 있다.

 

3부 항주 세 선비와의 교유 / 4부 존명 의식과 우정론

홍대용과 항주 세 선비의 교유를 집중적으로 고찰했다. 중국 절강성의 향시에 급제한 세 선비의 과거 답안지를 통해 이들이 얼마나 우수한 선비였던가를 확인하고, 육비·엄성·반정균 각자의 생애와 학문적 성향을 살폈다. 아울러 이들에게 선배이자 스승으로서 영향을 미친 오영방을 비롯한 항주의 고사(高士)들에 대해서도 다루었다. 항주 세 선비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를 토대로 해서, 홍대용이 이들과 교유하며 사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었던 지점들을 밝혔다. 척화파 김상헌의 한시를 수록한 『감구집』, 청나라의 지배에 저항한 주자학자 여유량, 조선이 계승한 명나라의 의관 제도 등에 대한 공통 관심에서 드러난 존명(尊明) 의식을 바탕으로, 홍대용과 항주 세 선비가 화이(華夷: 중국인과 외국인)의 차별을 초월해 우정을 맺을 수 있었음을 논증했다. 또한 홍대용이 한인(漢人) 지식인들뿐 아니라 청나라 황족과 교분을 맺은 특이한 사건도 함께 살폈다.

 

5부 사상적 변화

북경 여행 이후 나타난 홍대용의 사상적 변화를 분석했다. 홍대용을 비롯한 인사들이 청나라의 눈부신 번영을 목도한 결과 북학사상이 대두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통설화되기는 했지만, 청 문물에 대한 홍대용의 관찰을 남김없이 종합하고 깊이 있게 분석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는 홍대용이 청나라 선진 문물의 공통 특징을 꿰뚫어 보면서, 존명 의리와 배치되지 않는 청 문물 수용의 논리를 모색했던 사실을 규명했다. 청 제국의 발전상을 목도한 것과 아울러, 항주 세 선비와 교유하면서 청나라 학계의 고증학풍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홍대용의 사상적 변화를 초래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는 『간정필담』 중의 학문적 대화 부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이러한 부분은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이 장에서는 홍대용이 건륭 시대 고증학의 한 중심지인 항주 출신의 세 선비와 주자의 『시경』 해석을 두고 벌인 치열한 토론을 중심으로, 당시 이루어진 높은 수준의 학술 담론을 면밀하게 분석했다. 또한 홍대용의 『간정필담』을 통해 소개된 청조 고증학이 당시 조선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도 살폈다.

차례

책을 펴내며

서론

1부 여행에 나서기까지

1장 가문과 학업
남양 홍씨 명문가의 자제 / 성리학자 김원행의 애제자
2장 부친 홍역의 임지에서
부친의 지방관 활동 / 부친의 유배와 은거
3장 농수각의 혼천의
노학자 나경적과의 만남 / 혼천의 제작과 개량 / 수촌 은거 시절

2부 청 제국의 수도에서

1장 을유년 동지 사행
친지와 우인들의 송별 / 압록강 너머 북경까지
2장 천주당과 서양 천문학 수용
천주교 남당 방문 / 천주교 동당과 관상대 탐방 / 천주교 탐문
3장 유리창과 당금 연주법 습득
흠천감 관원 장경의 점포 방문 / 태상시 악관 유생의 점포 방문

3부 항주 세 선비와의 교유

1장 절강 향시의 급제자
항주 선비와의 운명적 만남 / 을유년 절강 향시와 세 선비의 주권
2장 호탕한 선비 육비
불우한 시인이자 화가 / 주자학파에 비판적인 학자
3장 고결한 선비 엄성
짧은 생애와 폭넓은 교유 / 다재다능한 문인 학자
4장 명랑한 선비 반정균
입신출세를 지향한 재사 / 시서화와 불교 심취
5장 문제적 인물 오영방
명나라 유민의 기풍을 계승한 학자 / 옛 항주의 고상한 선비들

4부 존명 의식과 우정론

1장 『감구집』과 김상헌의 한시
『감구집』을 통해 깊어진 우정 / 김상헌의 시가 『감구집』에 실린 사연 / 왕사정과 『감구집』에 대한 뜨거운 관심
2장 만촌 여유량에 대한 관심
여유량과 그의 저술 탐문 / 여유량에 대한 국내의 관심 고조 / 여유량과 홍대용의 사상적 영향 관계
3장 명나라 의관 제도 계승론
청나라 의관 제도 관찰 / 의관 제도에 관한 토론 / 조선 여성의 복식 개혁 추구
4장 화이 차별을 초월한 우정
존명 의리에 대한 공감 / 세 선비의 처신에 대한 충언 / 최후의 작별 편지
5장 청 황족과의 특이한 사귐
왕자 ‘양혼’의 정체 / 청나라 왕자의 각별한 환대 / 빈번한 서신 교환과 서양 시계 선물 / 만주인과 우정을 맺게 된 이유

5부 사상적 변화

1장 청 제국의 발전상 관찰
강희제와 청조 통치 예찬 / 시장·수레·선박 / 건물·도로·성곽·벽돌 / 편리한 일용 기물들 / 청나라의 무기와 악기
2장 북학사상의 태동
청 문물의 공통 특징 / ‘대규모 세심법’과 『주례』 / 청 문물 수용의 논리
3장 조선에서 온 ‘성리학 대가’
청나라 학풍 탐색 / 육비와의 양명학 토론 / 엄성과의 주자학 토론
4장 새로운 고증학풍의 충격
건륭 시대 고증학의 한 중심지, 항주 / 주자의 시경학에 대한 비판과 반론 / 최종 토론과 홍대용의 총평 / 주자의 주역관에 대한 이견
5장 고증학풍에 대한 반향
귀국 후 홍대용의 대응 / 이덕무의 적극적 관심 / 박지원의 개방적 자세 / 고증학 수용의 한계

결론

미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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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옮긴이

김명호

1953년 부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덕성여대 국문과와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열하일기 연구』, 『박지원 문학 연구』, 『초기 한미관계의 재조명』, 『환재 박규수 연구』가 있으며, 국역서로 『연암집(전3권)』(공역)과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가 있다.

편집자 100자평
담헌 홍대용을 이야기할 때 그의 북경 기행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이 6개월간의 여행이 그의 삶을 나누는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담헌이 남긴 3종의 여행기를 면밀히 분석하여 홍대용의 학문과 사상의 변화 추이를 살폈다. 아울러 북경에서 만난 세 명의 항주 선비에 대해서도 그 가계와 학맥까지 꼼꼼히 살핌으로써 이들과 담헌의 만남이 조선 학계와 사상계에 매우 중요한 의미였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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