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 불교를 말하다

『청한잡저 2』와 『임천가화』

박희병 지음

발행일 2024년 8월 26일
ISBN 9791192836881 93810
면수 524쪽
판형 변형판 145x225, 반양장
가격 35,000원
주요 내용

경계인 김시습의 불교 사상

 

김시습은 ‘경계인’이다. 그의 삶은 방내(方內)는 물론 방외(方外)에도 안주할 수 없는, 신산한 삶이었다. 즉, 그가 실존적으로 거처했던 곳은 방내와 방외의 사이, 그 ‘경계’였다. 그렇다면 김시습의 사상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방내의 유자(儒者)의 삶인가, 방외의 불자(佛者)의 삶인가? 이 책은 김시습이 남긴 불교 텍스트 『청한잡저 2』와 『임천가화』를 분석해 그의 불교론은 물론 그의 전체 삶을 관통하는 사상의 궤적을 들여다본다. 『금오신화』라는 불후의 소설을 남긴 문학가일 뿐 아니라 인민의 입장에서 활발한 사상 행위를 전개한 사상가이기도 한 김시습, 그는 어떤 세계를 꿈꾸었을까?

 

두 번의 양광(佯狂), 김시습이 현실을 마주한 방법

 

김시습은 세종 시절 ‘5세 신동’으로 불린 천재였다. 문헌에 따라서는 김시습이 다섯 살 때 대궐에 가서 세종을 친견했다고 되어 있는 것도 있지만, 이는 잘못이다. 김시습이 대궐에 간 시기는 여덟아홉 살 무렵이다. 김시습이 시를 잘 짓는 신동이라는 소문을 들은 세종은 승정원 승지 박이창에게 김시습을 만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고 지시한다. 훗날 김시습은 이 일을 이렇게 회상한다.

 

임금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친히 인견(引見)하고 싶지만 남들이 듣고 해괴하게 여길까 걱정된다. 부모에게 돌려보내 아이의 재주를 밖으로 드러내지 말고 가르치기를 몹시 부지런히 하게 하라. 장성하여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이 아이를 크게 쓰겠노라”라고 하셨으며, 물품을 하사한 뒤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김시습이 만년에 양양(襄陽) 부사 유자한에게 보낸 편지 중에 나오는 말이다. 어린 시절의 이 체험은 김시습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5세 신동의 삶은 이로 인해 평생 불우했다.

스물한 살의 청년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다가 문득 통곡하고 책을 불살라 버린다. 그러고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방에서 뛰쳐나와 똥통에 빠진다. 이른바 ‘양광’(佯狂)이다.

‘양광’은 거짓으로 미친 척 행동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동아시아의 지식인이 현실과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에서 택하는 행위 양식의 하나이다. 양광은 일종의 자해행위 같은 것으로,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버리는 행위이다. 일개 포의에 불과했던 김시습이 양광을 하며 평생 절의를 지켰던 까닭은 어린 시절 세종으로부터 받은 격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양광’은 은둔과는 다른 행위 방식이다. 가령 신라의 최치원은 망해 가는 신라를 보며 ‘은둔’을 택했다. 은둔이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면, 양광은 현실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고 초월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 속에 있으면서 현실을 거부하겠다는 태도이다. 양광이라는 행위로써 김시습은 수양대군의 불의에 맞섰다.

이후 김시습은 9년 가까이 승복을 입은 채 전국 각지를 방랑하고, 29세 때인 1463년부터 37세 때인 1471년까지 경주 금오산에 우거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소설 『금오신화』를 집필한다. 금오산 생활을 청산하고 상경한 때는 세조가 죽은 지 3년 뒤인 성종 2년이다. 그리고 47세 때인 1481년 승복을 벗고 환속했으며 안씨의 딸과 재혼한다. 하지만 또 한 번의 사건이 김시습의 삶을 뒤틀었다. 바로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이다. 김시습은 다시 미치광이가 되었다. 두 번째 양광이다.

1483년, 다시 승복을 입고 서울을 떠난 김시습은 1493년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한다. 자신의 자화상에 쓴 글인 「자사진찬」(自寫眞贊: 자화상에 붙인 찬)을 쓴 것도 무량사에 머물 때인데, 찌푸린 얼굴의 이 자화상은 현재 무량사에 보관되어 있다. 고된 삶을 살면서 두 번이나 양광을 했던 김시습은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본서 497김시습 연보참조)

유자(儒者)로 과거 공부를 하던 김시습이 양광을 하며 승복을 입고 승려의 삶을 살다가 환속해 결혼까지 하고 이후 다시 한번 양광을 하고 승려의 삶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한 김시습. 그렇다면 김시습의 최후의 풍경은 어떠했을까. 그를 어떤 사상가로 기억해야 하는가.

김시습의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살피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남긴 텍스트를 분석하는 작업일 것이다.

 

유·불을 겸전(兼全)한 사상가, 유승(儒僧) 김시습

 

‘양광’을 김시습의 삶의 태도라고 한다면, 그의 사상에 대한 평가는 좀 더 복잡해진다. 그의 정체성을 좀처럼 콕 잡아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유교뿐 아니라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게다가 도교에 관한 글을 쓰기까지 했다. 김시습은 어떤 때는 승려로서의 정체성을 표방했으며, 어떤 때는 유자로서의 정체성을 표방했다. 더 문제는 승려로 자처할 때 불교만이 아니라 유교에 대한 글을 썼고, 유자로 자처할 때 유교만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글을 썼다는 사실이다. 그는 평생 유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사상을 모색했다. 이 점은 대체로 둘 중 어느 하나에 속한 전통 시대의 사상가들과 구별되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김시습의 사상적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 물음 앞에서 사람들은 김시습을 유(儒)·불(佛)·도(道) 삼교를 회통시킨 사상가라 보기도 하고, 유교를 중심에 둔 채 불교를 포섭한 사상가로 보기도 하며, 불교에 귀의했다가 유교로 돌아선 사상가로 보기도 한다. 다음은 김시습이 만년에 쓴 『잡설』(雜說)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부처란 ‘각’(覺: 깨달음)이다. 이윤(伊尹)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이 낸 백성 가운데 선각자(先覺者)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말한다. 부처는 중국의 ‘성’(聖)이라는 말과 같으니, 성(聖)이란 통달하지 못함이 없는 것이다. 부처는 서쪽 오랑캐(인도를 가리킴)의 선각자로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는 자이다.

 

김시습은 불교의 교리를 비판하면서도 부처는 의연히 ‘성인’으로 간주한다. 김시습은 관동 시절 이후 성리학을 정학(正學)으로 간주하고 불교를 이단으로 여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의 진리성을 깡그리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김시습의 이런 면모는 여느 성리학자들과 사뭇 다르다.

퇴계 이황은 김시습을 색은행괴(索隱行怪)에 가깝다고 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 ‘색은행괴’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 궁벽한 것을 캐내고 괴이한 일을 행함을 뜻한다.

이에 반해 율곡 이이는 김시습이 ‘심유적불’(心儒跡佛)이며, 그의 절의는 ‘백세(百世)의 스승’에 가깝다고 했다. ‘심유적불’은 마음(즉 사상)은 유학인데 겉으로 행동하기를 불자처럼 했다는 뜻이다. 이이는 김시습이 본래 유(儒)이지만 그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미친 짓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시습이 불교도로 자처하며 불교 관련 저술 활동을 열심히 했던 금오산 시절이나 수락산 시절 전기는 말할 나위도 없지만, 만년인 관동 시절이나 무량사 시절의 김시습조차도 심유적불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김시습에게 불교는 ‘비진리’가 아니었다. 그는 유교만큼은 아니라 할지라도 불교에도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시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고 보아야 옳다. 죽기 직전에 쓴 글들이 의연히 부처에 대한 존중을 보여 주고 있는 데서 그 점이 단적으로 확인된다. 이렇게 본다면 김시습의 마음이, 즉 그의 사상 세계 내부가 유교로만 꽉 채워져 있었고 불교는 전연 없었다고 함은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이의 말은 ‘심유불(心儒佛) 적불(跡佛)’로 수정되어야 옳을 것이다.

16세기 후반, 사림파의 이론적·학문적 지도자였던 이이는 김시습을 유자로 적극적으로 포섭함으로써 그를 절의의 아이콘으로 삼고자 했다. 게다가 이이 본인이 한때 불문에 의탁한 적이 있으니 자신의 이런 과거가 김시습을 두둔하는 논리 개발을 추동했을 수도 있다. 문제는 지금의 학자 중에도 이이의 ‘심유적불’설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심유적불’의 프레임으로 김시습의 사상을 재단할 경우 김시습 사상의 독특한 면모는 소거되고 만다.

 

동아시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불교를 대상화한 텍스트 『청한잡저 2』와 『임천가화』

 

김시습은 꽤 많은 불교 저술을 남겼는데, 『청한잡저 2』, 『연경별찬』, 『십현담요해』, 『대화엄일승법계도주』, 『화엄석제』, 『임천가화』가 그것이다. 이중 불교론, 즉 불교에 대한 담론에 해당하는 것은 『청한잡저 2』와 『임천가화』 두 종이고 나머지는 불경에 대한 풀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종의 책은 불교에 대한 김시습의 ‘입장’을 표명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박희병 교수는 『청한잡저 2』(淸寒雜著二)의 가치에 주목했다. 『청한잡저 2』는 김시습이 금오산 시절(1463~1470)에 쓴 책인데, 김시습의 문집인 『매월당집』(梅月堂集)에는 ‘잡저’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매월당집』에는 두 편의 잡저가 있는데, 박 교수는 도교에 관해 쓴 잡저를 ‘청한잡저 1’, 불교에 관해 쓴 잡저를 ‘청한잡저 2’라고 구분해서 부른다). 『청한잡저 2』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군주의 잘못된 불교 숭배에 대한 혹독한 비판이다. 이 책은 불교의 관점에서 군주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집중적으로 논하고 있다. 김시습은 불교로 자신의 정치사상을 펼쳐 보이고 있다. 이 책은 유교와 불교 어느 한쪽이 아니라 그 ‘경계’에서 불교를 논한다는 점에서 김시습의 경계인적 면모를 잘 보여 준다. 이 책은 지금껏 별로 주목받지 못했는데, 아마도 심유적불의 관점에서 김시습을 재단하려니 자연스레 깊이 다뤄지지 못한 듯하다. 게다가 기존 번역에 오역이 많은 데다 주석 역시 정밀하지 못했다. 박 교수는 본서에서 이 책 전체를 새로 번역하고 주석을 붙였다.

 

김시습의 불교 필기(筆記) 『임천가화』(林泉佳話)도 불교론을 담고 있는 책으로, 수락산 시절인 1476년경에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그간 이름만 있을 뿐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는데, 2023년 차충환 교수에 의해 일본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에 소장되어 있음이 알려졌다. 이 책은 필사 과정에서 생긴 오탈자로 인해 교감을 하지 않고서는 뜻이 통하지 않는 곳이 매우 많다. 이에 박 교수는 교감과 역주 작업을 통해 완역한 『임천가화』를 본서에 수록했다. 아울러 『임천가화』의 원본을 확인할 수 있도록 부록으로 이 책의 영인본도 실었다. (본서 417쪽 부록1 林泉佳話)

 

『청한잡저 2』는 묻고 답하는 문대 형식으로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사회적·정치적 효용은 무엇인가, 불교의 그릇된 숭배는 어떤 폐해를 낳는가 하는 등등을 특히 정치사상과의 관련 속에서 밝혔다. 객이 청한자에게 한 질문의 성격을 보면 주된 독자가 유자로 상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임천가화』의 독자는 승려, 특히 선승(禪僧)이다. 그래서 전문적인 불교 서적이 매우 많이 인용되거나 거론된다. 『청한잡저 2』가 문집에 실린 반면 『임천가화』는 문집에 실리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일본 내각문고 필사본 『매월당집』에도 『임천가화』는 ‘별집’(別集)으로 실려 있다.

 

김시습의 이 두 책은 불교를 ‘대상화’해 바라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하여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는 정치와 인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가, 부처의 가르침은 어디에 그 본질이 있는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사찰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승려의 본분은 무엇인가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전근대 동아시아에 불경(佛經)을 해석하거나 불서(佛書)의 요지를 밝힌 책은 수없이 많지만 정작 이런 종류의 책은 찾기 어렵다. 이 점에서 이 두 책은 동아시아 불교학에서 주목할 책이다.

박희병 교수는 본서의 제1부에 해당하는 「김시습의 불교론」에서 이 두 책의 성격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김시습이 남긴 책 가운데 불교론에 해당하는 것은 이 둘이 전부다. 그러므로 이 두 책을 통해 김시습이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부처를 어떤 존재로 봤는가, 불경 곧 부처의 가르침에 어떤 특징이 있다고 봤는가, 삼세설(三世說)·윤회설·천당지옥설과 같은 불교 교리에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 불법(佛法)의 요체를 무엇이라고 봤는가, 깨달음이란 무엇이며 어찌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봤는가, 군주의 불교 숭배나 승려의 정치 참여에 대해 어찌 생각했는가, 승려의 본분을 무엇이라고 봤는가, ‘지금’ ‘이곳’의 불교 즉 ‘현실불교’를 어떻게 인식했는가 하는 등등에 대해 알 수 있다.

 

김시습에 대한 오해와 오독

 

김시습의 사상 세계에서 유교와 불교가 각각 어떤 지위를 점하는가, 또 유교와 불교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김시습의 불교 사상 자체에 대한 논의도 충분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김시습이 쓰지도 않은 책이 김시습이 쓴 책으로 둔갑해 통용되고 있는가 하면, 김시습이 묵조선(默照禪)을 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유포되어 있기도 한 실정이다. 많은 오해와 오독 중에서 두 가지만 소개한다.

 

(1) 『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가 김시습의 저술이라는 오해

민영규 교수는 고려 시대 승려 일연(一然)이 보편(補編)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의 일본 간본(刊本) 중 일연의 서문이 시작되는 행 바로 위에 적힌 “傳付守澄上主雪岑”(전부수징상주설잠)이라는 여덟 글자 중 ‘雪岑’(설잠)을 김시습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김시습이 본래 조동종에 관심이 컸고, 우리나라 조동종의 맥이 ‘일연―김시습’으로 이어진다고 했다(민영규, 「김시습의 조동오위설」, 『대동문화연구』 13, 1979, 82~83면). 이 때문에 『조동오위요해』가 김시습의 저술이라는 것인데, 사실 근거가 없는 주장일 뿐이다. 하지만, 여태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비롯한 학계의 중론은 이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본 간본에 보이는 ‘雪岑’(설잠)은 김시습의 법명이 아니고, 에도시대 초기 일본의 선승인 본진(梵崟)의 자(字)이다. 일본 발음으로 셋신(雪岑). 그리고 ‘守澄’(수징)은 고미즈노 천황의 여섯째 아들로 승려인 슈초오 홋신노오(守澄法親王, 1634~1680)를 가리킨다. 그래서 군주나 신위(神位)를 뜻하는 존칭인 ‘상주’(上主)라는 칭호가 수징 뒤에 붙은 것이다. ‘전부’(傳付)는 전하여 건네주다, 건네받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傳付守澄上主雪岑”(전부수징상주설잠)은 슈초오 상주와 셋신에게 전해 받았다는 뜻이다. 일본판 『중편조동오위』는 겐뽀오 엔류우(玄峰淵龍, 1643~?)가 1680년에 간행한 것이다. 슈초오와 셋신 두 승려가 활동한 시기와 책의 간행 시기가 얼추 맞아떨어진다. 그렇다고 한다면 민 교수의 연쇄적 추론은 모두 사실과 어긋난 것이다. 그리고 이 추론에 기대어 나온 여러 논문 및 주장들도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13김시습의 불교론참조)

 

(2) 김시습의 호 매월당이 금오산 시절부터 사용되었다는 오해

김시습은 금오산 시절과 수락산 시절 전기에는 설잠(雪岑)이라는 법명과 청한자(淸寒子)라는 법호를 사용했다. 이는 승려의 자의식을 보여 주는 칭호들이다. 하지만 수락산 시절 후기에는 동봉(東峰)과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이 호들에는 은둔한 선비(승려가 아니라)의 자의식이 담겨 있다. 관동 시절에는 동봉이라는 호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새로 췌세옹(贅世翁)이라는 호를 사용했다. ‘췌’는 ‘혹’을 말하니 쓸모없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췌세옹은 세상에 쓸모없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김시습의 이 호에는 낙척불우(落拓不遇)한 선비의 자의식이 담겨 있다. 똑같은 선비의 호일지라도 동봉과 벽산청은에는 뜻과 포부를 간직한 고상한 선비의 자부 같은 것이 느껴지지만 췌세옹은 그렇지 않다. 이 호에는 어떤 희망도 어떤 꿈도 어떤 포부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벼랑 끝에 홀로 서 있는 듯한 선비의 내면 감정이 느껴진다.

말년에 해당하는 무량사 시절에 김시습은 계속 췌세옹이라는 호를 사용하는 한편 ‘매월당’(梅月堂)이라는 호를 새로 사용했다. 흔히 김시습이 매월당이라는 호를 금오산 시절에 처음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종래 그렇게 본 근거는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짓고 나서 쓴 시인 「『금오신화』 뒤에 적다」(題金鰲新話後)의 한 구절에 “滿窓梅影月明初”(만창매영월명초)라 하여 ‘매’(梅)와 ‘월’(月) 두 글자가 나오는데 이 두 글자를 합치면 ‘매월’이 되니 이를 통해 당시 김시습이 매월당이라는 호를 썼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그 전부다. 이는 실증의 비약이다. 동아시아 매화시의 전통에서 매와 달은 종종 병칭된다. 『매월당집』의 시문에서는 김시습이 매월당이라는 호를 사용한 예가 확인되지 않는다. 김시습이 최만년에 사용한 매월당이라는 호는 자신이 거처하던 무량사의 한 건물인 ‘매월당’에서 취한 것이다. 문인이 자편고를 남길 경우 그 명칭은 대개 만년의 호를 취하는 게 일반적이다. 가령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도 자편고의 명칭을 최만년의 호인 뇌상관(雷象觀)에서 취해 ‘뇌상관고’라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13김시습의 불교론참조)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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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김시습의 불교론
『청한잡저 2』
『임천가화』

부록1 『林泉佳話』
부록2 「『首楞嚴經』跋」 / 「『法華經』跋」
김시습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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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옮긴이

박희병 지음

경성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국문학 연구의 외연을 사상사 연구와 예술사 연구로까지 확장함으로써 통합인문학으로서의 한국학 연구를 꾀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국전기소설의 미학』, 『한국의 생태사상』, 『운화와 근대』, 『연암을 읽는다』, 『21세기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공저), 『유교와 한국문학의 장르』, 『저항과 아만』,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나는 골목길 부처다-이언진 평전』, 『범애와 평등』,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통합인문학을 위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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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100자평
심유적불(心儒跡佛) 프레임으로 김시습의 사상을 재단할 경우 김시습 사상의 독특한 면모는 소거되고 만다. 김시습은 유교와 불교를 겸전함으로써 유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불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했다. 전근대 한국에, 그리고 전근대 동아시아에 이런 사상가가 달리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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