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오신화

박희병, 정길수 옮김 | 김시습 지음

발행일 2024년 12월 9일
ISBN 9791192836966 04810
면수 176쪽
판형 변형판 150x215, 양장
가격 17,000원
분류 千년의 우리소설
한 줄 소개
『금오신화』에 담긴 김시습의 마음 읽기
주요 내용

김시습 내면의 자화상 『금오신화』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창작한 단편소설집으로,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소설(「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은 교과서에도 수록된 아주 유명한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을 쓴 시기는 김시습의 나이 29세에서 37세 사이로, ‘금오산 시절’이라 불리는 9년간의 시기인데, 역자 박희병은 그의 다른 책(김시습, 불교를 말하다, 돌베개, 2024)에서 『금오신화』를 쓴 시기를 1467년, 즉 김시습이 서른세살 때 썼을 거라고 보고 있다. 8년의 방황을 마치고 경주 금오산 용장사에 정착한 김시습은 그의 사상적 방황의 결과물로 유불도에 대한 기본 입장을 정리한 글을 집필했다. 불교에 관한 관점을 정리한 『청한잡저(淸寒雜著) 2』, 도교의 여러 담론과 미신적인 측면을 비판한 『청한잡저 1』이 모두 이 시기에 집필된 글들이다. 즉, 김시습은 중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완전히 불교에 귀의하지 않았고, 늘 유불도를 넘나들며 경계에 서 있었다. 퇴계 이황은 이런 김시습을 색은행괴(索隱行怪)에 가깝다고 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 ‘색은행괴’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 궁벽한 것을 캐내고 괴상한 일을 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반해 율곡 이이는 ‘심유적불’(心儒跡佛)이며, 김시습의 절의는 ‘백세(百世)의 스승’에 가깝다고 했다. ‘심유적불’은 마음(즉 사상)은 유학인데 겉으로 행동하기를 불자처럼 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에 창작한 『금오신화』도 심상하게 볼 작품은 아니며,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며 김시습의 사상과 작품의 의미를 연관 짓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작품들이 모두 그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쓰였다고 볼 수는 없다. 김시습이 정립한 유불도에 대한 기본 입장과 배치되는 내용이 『금오신화』의 작품들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금오신화』를 읽을 때는 김시습의 사상적 배경을 고려하는 것도 필요할 테지만, 그보다 먼저 작품 자체로 볼 필요가 있다. 어디까지나 문학은 문학이고, 사상은 사상이다. 문학을 사상으로 환원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만복사저포기」에는 남자 주인공 양생이 만복사의 부처와 내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여자 주인공이 ‘삼세(三世)의 인연’을 말하며, 결말 부분에서 여자 주인공이 말하길, 양생이 절에 재(齋)를 올려 줘 그 덕으로 자신이 다른 나라에 남자로 태어났으니 서방님도 선업(善業)을 닦아 윤회를 벗어나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김시습은 금오산 시절 불교의 삼세인연설, 윤회설을 실체적 진리로 보지 않았으며, 절에 재를 올리는 행위도 부정적으로 보았다. 인간이 죽으면 필경 ‘기’(氣)가 소멸하므로 정신이 유전(流傳)할 리 만무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시습은 왜 「만복사저포기」에서 삼세인연설과 윤회설을 말한 것일까? 서사의 방편, 즉 하나의 ‘서사 장치’라고 생각된다. 즉 이야기를 흥미롭게 끌어 나가기 위해 불교 담론을 적절히 활용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담론을 구사한다고 해서 김시습이 이를 진리로 간주하거나 이를 전파하고자 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데서 김시습의 융통성과 소설가로서의 면모가 확인된다 하겠다.

「만복사저포기」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이 점에서는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도 동일하다. 이 작품들에 그려진 사랑은 모두 애절하고 안타깝다. 사랑의 시간은 너무나도 짧다. 가령 「취유부벽정기」에서 남녀 주인공의 만남은 단 하룻밤에 불과하다. 하룻밤 대화하고 시를 주고받는 것, 이것이 그 전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영혼은 깊은 교감에 이르며, 홍생은 이후 여인을 그리워하다 병이 들어 죽는다. 550여 년 전에 쓰인 소설 속 사랑의 모습이다.

그런데 김시습은 단지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말하기 위해 이 작품들을 쓴 것은 아니다. 이들 작품에서 남녀의 변함없는 사랑은 하나의 ‘은유’에 해당한다. 바로 이 은유 속에 작자가 애써 말하고자 한 메시지, 즉 작품의 주제가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 작품의 사랑은 무엇의 은유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남녀 주인공의 삶에 대한 ‘태도’와 서로를 향한 ‘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의 여주인공은 모두 감당할 수 없는 폭력 앞에서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 뿐만 아니라 이들 작품의 남녀 주인공은 모두 헤어지고 나서도 서로 한결같은 마음을 보여 준다. ‘한결같은 마음’, 즉 상대에 대한 영원히 변치 않는 이 마음은 전통 시대의 윤리학 내지 미학에서 보면 곧 절개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김시습이 사랑을 통해 말하고자 한 가치는 바로 이 절개, 즉 ‘절의’(節義)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절의는 김시습이 눈을 감을 때까지 평생 굳건하게 지킨 가치 태도이자 삶의 지표였다. 김시습이 절의의 삶을 산 것은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기인한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평생 정치권력과 긴장 관계 속에 있었다. 그리하여 백성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정당하지 못한 권력과 잘못된 정치를 비판했다. 요컨대 김시습에게 있어 절의라는 윤리학 내지 미학은 정치사상적으로 전제 군주에 대한 비판과 백성에 대한 옹호로 이어진다.

따라서 금오신화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맞서 김시습 자신이 취한 행로(行路)와 실존적 태도의 미학적 육화(肉化). 이 점에서 그것은 김시습의 내면과 정신세계를 더없이 잘 보여 주는 일종의 자화상이라 이를 만하다.

 

 

정확한 번역,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읽는 『금오신화』

 

『금오신화』는 이가원 선생이 1953년에 처음 번역한 이래 여러 사람이 번역 작업을 하였다. 시중에 나와 있는 번역본들은 모두 이가원 선생의 작업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수정되지 않은 오류들이 있다.

70년을 넘긴 지금까지도 여전히 번역의 오류가 고쳐지지 않는 까닭은 『금오신화』의 원문이 어렵기 때문이다. 김시습이 구사한 수준 높은 한문 문장을 번역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금오신화』는 장르상 전기소설(傳奇小說)에 속하는데, ‘전기소설’은 다른 소설 장르와 달리 작품 가운데 ‘시’(詩)가 많이 나온다. 전기소설에서 시는 작중 인물의 내면 심리와 미묘한 감정을 표출하는 도구로 쓰인다. 게다가 『금오신화』에는 아주 긴 한시나 ‘사’(詞)가 실려 있기도 한데, 이런 것은 특히 그 시상(詩想)이나 맥락을 놓치거나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에 오역하기 쉽다. 그럴 경우 독자는 『금오신화』의 본래 뜻,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뜻을 알아채기 어렵다.

김시습은 문장가이며, 특히 시재(詩才)가 뛰어났다. 그는 『금오신화』를 쓰면서 시에 큰 힘을 쏟아부었다. 그래서 시에서 김시습의 작가적 역량과 빼어난 감수성을 읽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잘못 번역한 한시로는 김시습이 시에 담은 메타포(상징)와 숨은 의미, 그리고 그 맥락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종래의 번역들에 보이는 중대한 오역의 사례 몇 가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은 만복사에서 살았을까, 아니면 만복사 근처에서 살았을까?

양생이 어디에서 살았는가가 뭣이 중한가? 할 수도 있지만, 확실히 알고 보면 내용이 달리 보일 것이다. 기존 번역본을 보면, 「만복사저포기」에서 양생이 사는 곳을 ‘만복사의 동쪽 방’이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원문의 구두를 잘못 뗀 데서 기인한다. 즉 “獨居萬福寺之東, 房外有梨花一株”(독거만복사지동, 방외유이화일주)로 구두를 떼야 할 것을, “獨居萬福寺之東房, 外有梨花一株”(독거만복사지동방, 외유이화일주)로 구두를 뗀 것이다. 그래서 만복사 절집 밖 동쪽에 있는 집에 거주한 양생을 만복사 절집 안의 동쪽 방에 거주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었다. 만일 기존의 번역대로 양생이 만복사 안에 살았다고 한다면, 양생이 여인을 자기 방으로 데려가지 않고 만복사 행랑 끝의 조그만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2) 「취유부벽정기」에서 홍생은 상인일까, 선비일까?

「취유부벽정기」에서 홍생이 추석날 장사하러 평양에 갔다고 한 것은 원문의 “抱布貿絲于箕城”(포포무사우기성)의 맥락적 의미를 읽지 못한 데 기인한다. 이 구절은 『시경』 위풍(衛風)의 「맹」(氓)이라는 시에 “어리석은 남자/베를 갖고 명주실을 사러 왔네/사실은 명주실을 사러 온 게 아니라/내게 수작을 부리러 왔네”(氓之蚩蚩, 抱布貿絲. 匪來貿絲, 來卽我謀)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래서 ‘포포무사’(抱布貿絲)는 ‘장사를 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여자에게 수작을 부리다’, ‘여자를 꾀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 그러므로 홍생의 신분은 상인이 아니라 선비다. 여주인공 기씨도 홍생을 ‘문사’(文士)라고 했다.

 

(3) 「만복사저포기」에서 여주인공이 부른 사(詞) 작품 「만강홍」(萬江紅)을 제대로 번역해서 읽어보자.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사(詞)는 구법(句法)이 정해져 있는데, 종래의 번역은 대개 구법에 따라 구두를 떼지 않아 정확하게 번역되지 않았다 일부를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원문의 구두를 뗀 부분과 같이 보아야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다.

 

<기존 번역본>

쌀쌀한 봄 날씨에 명주 적삼 얇아라 惻惻春寒羅衫薄,(측측춘한나삼박)

몇 번이나 애끊었나 금압 향로에 불 식어 가니. 幾回腸斷金鴨冷.(기회장단금압냉)

저문 산은 눈썹처럼 검푸르게 엉겨 있고 晩山凝黛,(만산응대)

저녁 구름은 하늘에 고루 퍼졌구나. 暮雲張繖,(모운장산)

 

<본서의 번역>

서러워라 쌀쌀한 봄날 惻惻春寒,(측측춘한)

얇은 비단 적삼 입고 몇 번이나 애간장 끊어졌나. 羅衫薄、幾回腸斷.(나삼박、기회장단)

향로는 차갑고 저문 산은 검푸른데 金鴨冷、晩山凝黛,(금압냉、만산응대,)

해 질 녘 구름은 우산을 펼친 듯. 暮雲張繖.(모운장산)

 

이외에도 이 책 ‘해설’에서 번역 오류의 대표적인 사례를 정리해 두었다.

『금오신화』를 흔히 한국 최초의 소설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금오신화』는 우리 소설사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긴 하나 최초의 소설은 아니다. 『금오신화』보다 5백 몇십 년 전 이미 소설이 창작되었다. 바로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호원」(虎願; 일명 김현감호金現感虎)이다. 고려 초에는 최치원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최치원」이라든가 「조신전」(調信傳)이 지어지기도 했다. 이것들은 모두 아직 좀 미숙하기는 해도 『금오신화』와 같은 전기소설에 속한다. 소설사적으로 볼 때 『금오신화』는 우리나라의 이런 유구한 소설 창작의 전통을 잇고 있다.

『금오신화』는 후대의 소설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전반 신광한(申光漢)의 『기재기이』(企齋記異)와 16세기 후반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초 성로(成輅)가 지은 「위생전」(韋生傳)과 「운영전」(雲英傳)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문학사에서 이처럼 중요한 작품의 한글 번역본이 나온 지도 70년이 넘었다. 이제는 정확한 번역본을 찾아 읽어볼 때도 되지 않았는가. 눈 밝은 독자의 일독을 권한다.

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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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사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만복사에서 저포로 내기를 하다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이생이 담장을 넘어가다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술에 취해 부벽정에서 놀다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남염부주에 가다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용궁의 잔치에 초대받다
갑집 뒤에 쓰다書甲集後

작품 해설 — 새로운 번역, 다시 읽는 『금오신화』

지은이·옮긴이

박희병 옮김

경성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한문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다. 국문학 연구의 외연을 사상사 연구와 예술사 연구로까지 확장함으로써 통합인문학으로서의 한국학 연구를 꾀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한국고전인물전연구』, 『한국전기소설의 미학』, 『한국의 생태사상』, 『운화와 근대』, 『연암을 읽는다』, 『21세기 한국학, 어떻게 할 것인가』(공저), 『유교와 한국문학의 장르』, 『저항과 아만』, 『연암과 선귤당의 대화』, 『나는 골목길 부처다-이언진 평전』, 『범애와 평등』, 『능호관 이인상 서화평석』, 『통합인문학을 위하여』 등이 있다.

박희병의 다른 책들

정길수 옮김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 『구운몽 다시 읽기』 『17세기 한국소설사』, 편역서 『길 위의 노래―김시습 선집』 『나는 나의 법을 따르겠다―허균 선집』, 논문 「전쟁, 영웅, 이념」 등이 있다. 한국 고전소설과 한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김시습 지음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조선 초기의 문인, 학자. 자는 열경(悅卿), 호는 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 법호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청한淸寒),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반궁(泮宮) 북쪽의 초가집에서 부친 김일성(金日省)과 모친 울진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1439년(세종 21), 5세 때, 정승 허조(許稠)가 집으로 찾아와 김시습의 시재(詩才)를 확인하였고, 이후 조정의 고관들이 김시습을 보기 위해 자주 집으로 찾아왔다. 김시습이 ‘오세신동’으로 불린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1443년(세종 25), 9세 무렵 세종이 승정원 승지 박이창(朴以昌)으로 하여금 김시습을 대궐로 불러 그 재능을 확인케 했는데, 김시습은 박이창 면전에서 시구를 짓고 글씨를 썼으며, 세종은 박이창을 통해 김시습에게 금포(錦袍: 비단 도포)를 하사하고 ‘훗날 이 아이를 크게 쓰겠다’는 말을 전한다. 1455년(단종 3, 세조 1), 21세 때, 삼각산 중흥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자 문을 닫고 3일을 나오지 않다가 홀연 통곡하고 책을 다 불태워 버린 후 미친 시늉을 하며 측간에 빠졌다가 달아났다. 이후 삭발한 후 중이 되어 법명을 설잠이라 하였다. 1463년(세조 9), 29세 때, 경주 금오산(남산) 용장사(茸長寺)에 우거하였는데, 이후 1467년경,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것으로 보인다. 1481년(성종 12), 47세에 환속했지만, 성종이 계비(繼妃) 윤씨를 폐비(廢妃)하고 사사(賜死)하는 사건을 보고 2년 만에 다시 승려의 복장을 하고 관동으로 향했다. 1493년(성종 24), 59세 때 「자사진찬」(自寫眞贊)을 짓고, 곧바로 이 해 2월, 무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자세한 사항은 『김시습, 불교를 말하다』(2024, 돌베개) ‘연표’ 참조.

편집자 100자평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스물한 살의 청년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소식에 통곡하며 책을 불사르고 풍덩, 똥물에 빠졌다. 양광(佯狂: 미친 척하기)으로써 이 시대의 불의(不義)에 맞선 이 청년은 중이 되어 8년을 떠돌다 29세 때 경주 금오산에 정착했다. 이 청년이 바로 『금오신화』를 쓴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다. 작품 속에서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주인공, 변치 않는 사랑을 나누는 남녀 주인공, 염라대왕과 대화를 나누는 박생은 모두 김시습 본인이다. 『금오신화』를 읽으며 김시습이 각 작품 속에 포석해 둔 은유의 의미를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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